2008. 7. 26. 10:23 비밀의 정원

죄책감

예전엔, 비가 오면 기분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
왜 그렇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나의 과거를 돌아보던 중 또렷한 기억이 날 찾아왔지.
마침, 그 시절엔 아이들 교육과 심리를 배우고 있던 시기였어.
희뿌연 공기를 뿜어내던 잿빛 하늘이 기억나. 마치,날 과거로 끌어당기는 것 같은 색조.  
난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고, 자작나무 숲을 산책하며 묵상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지.

 그 또렷한 기억이란,
내가 아마도  막 사춘기에 접어 들 나이였을거야.

 넷째 딸이었던 막내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난 언니니까 막내를 업어주고 먹여주고 했어.
부모님은 일이 많으셨으니까.
시골에선 원래 그랬어. 언니가 동생을 돌보지.

 말로 표현은 못했어도,
난 사랑받는 막내가 부러웠던 것 같아.
가끔은 귀찮기도 했겠지? 맘껏 놀지 못했을테니.
상상해봐. 아이를 업고 고무줄놀이나 구슬치기를 할 수 있겠니?
' 막내가 사라지면 좋겠다'
누구나 다 그래. 한번쯤은, 동생을 가진 아이들 대부분은 동생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나도 그랬어.

 그러던 어느 날,
막내가 젓병을 빨다가 병원으로 급히 달려가는 일이 생겼어.
자세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
그 원인도 모르겠고..
하룻밤이 지나고, 부모님은 돌아오셨지.
아랫마을 할머니가 우리 밥을 챙겨 주셨어.
동그런 회색 양은 상에 아이들이 모여 오이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서 물에 말은 밥을 먹던 기억.
안방에선 낮은 소리로 다투는 부모님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들렸어.
그날따라, 부슬부슬 온 종일 비가 내렸어.

 막내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도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어.
아이들도 묻지 않았지.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대신, 홀로 그 빗속을 울며 헤매이던 기억이 나.
한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갔다는 걸 알았던거야.

 우리 마을에선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에 태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상여를 지고 동네를 돌며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어 어이어~"
슬픈 노래를 부르곤 했지. 내게 죽음은 그런 거였어. 꽃상여를 타고 동네 한바퀴 도는 것.
그런데,
막내 동생은 꽃상여도 없이 쓸쓸히 갔나봐.
아이가 일찍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
부슬비가 내리던 날, 부모님은 아이를 어딘가에 묻고 오신 거였어.
그러나,
난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했지.
비가 내리면, 내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서 죽었다고,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죄책감 때문인 것도 모르고, 우울의 원인조차 가려진 채, 내 맘 깊은 곳에 슬픔이 자리잡았던 거야.
그 사건 이후로, 난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어.
또, 누군가가 말다툼을 하거나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불안해졌지.
그래서 고독한 섬을 그리워했을지도 몰라.

 비가 오는 날에 우울이 날 찾아오는 이유를 알고 난 후에도 난 별로 변하진 않았던 것 같아.
생활에 바쁘면 그나마 괜찮지만.. 시간이라도 나는 날에는 여전히 가라앉았지.
성인이 된 후에,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엄마에게 질문을 했어.
내 탓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
' 내 탓이 아니야. 그게 그 아이의 운명인거야'
그래도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완전히 씻지 못했는데..

 한 가지 부탁하고 싶어.
아무리 어린 아이에게라도,
어떤 큰 일이 생길 때는, 꼭, 반드시,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주길 바래.
아이가 오해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아이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게 될 테니까. 절대 침묵하면 안돼.
지금에와서 왜 이런 글을 쓰냐고?
나 같은 아이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야.
아이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영성은 어른들보다 뛰어날 때가 많은데, 키가 작다는 이유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시해서는 안돼.

 모래놀이를 할 때였지.
모래상자 중앙에 무덤을 만들고 잘 두드려주었어.
주변에 꽃을 심고, 무덤 앞에는 여자아이를 세웠지.
마음으로, 손으로, 울면서 난 막내동생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어.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났어.
난 비가 주는 우울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거야.
그 이후에야 난 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어.
비는 참으로 다양한 소리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지금은 비오는 날의 산책을 즐긴단다.

살다가,
원인모를 감정이 솟구칠 때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지 말고 자신을 들여다 봐.
네 마음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봐.
화해하지 못한 네 자신과 만나게 될 테니까.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될거야.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봐.
그리고, 우는 아일 달래주고 등을 토닥이며 꼭 안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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