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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03 2. 동작 그만

2019. 4. 3. 20:29

2. 동작 그만

"너는 왜 항상 웃니?"

내가  웃고 있다고?

몰랐는데?

이 나라에선 환한 얼굴을 해도 이유를 묻네.

미소 짓는 얼굴로 호의를 갖고 타인을 대하면 좋은 거 아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며 행동하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자 말문이 막혔다. 

교회와 서클활동 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때, 수줍어하고 말 없는 성격은 불편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부터 시도하며 나를 바꿔갔다.

노래를 좋아했기에 성가대에서 합창을 하고 모임에선 앞에 나가 율동을 하기도 했다. 

직장 부서별 잔칫날을 위해  '아기공룡 둘리' 춤을 가르쳐서 우리 팀이 대상을 타기도 했다. 

마음의 갈등을 견뎌내며 8여 년을 노력해서 밝은 표정과 웃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

타인을 만날 때면 마치 내 피부처럼 자연스러운 가면을 썼다. 

내 외적인 인격(페르소나)은 늘 웃고 있었나 보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인식하는 순간.

동작 그만! 

이상한 나라에서 낯선 선생님의 질문이 나에게 마법을 걸었다.

우중충하고 찌푸린 하늘과

매우 짧은 낮과 긴 긴 겨울밤.

기숙사에서는 반팔 입고도 사는데, 밖은 부츠와 털모자가 필수.

인내를 요구하는 순간들;

예를 들어 식료품점에서 빵 하나 사려고 해도 긴 긴  줄을 두 번 서야 하는 이 나라.

계산원에게 영수증 받을 때랑 점원에게 빵 받을 때.

메모지에 살 식료품 목록과 가격을 적어서 한꺼번에 보여준다.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화를 내기도 해서 조심.

고객이 왕? 그런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가장 고통스러운 인내는 생리현상을 참는 것.

처음 연수받던 건물은 화장실이 너무 더러웠다.

변기 위에 두 발로 올라앉아 쪼그리고 소변을 보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공중화장실은 유료인데, 그마저도 드물다.

견학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는데, 당황스럽게도 화장실이 오픈형이었던 적도 있었다.

러시아 유학생들 사이에서 생리적 욕구로 인해 생긴 눈물 나는 에피소드 하나쯤은 있을 정도다.

이마에 지도가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물러나고

코가 붉은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이던 시절

90 년대 초, 중반의 풍경이다.

차차 적응해 갈수록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간다.

퇴행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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